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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과 역사|문화 이야기📖

“고추는 한국 토종이 아니다”:고추가 한국에 오기까지의 매운맛의 식민·무역사

by yellow-brown 2025. 5. 14.

매운 음식 없이는 밥을 삼키기 어려운 당신, 혹시 고추가 한국 고유의 토종 식물이라고 믿고 있었나요? 사실 우리가 김치에, 고추장에, 찌개와 볶음에 매일같이 사용하는 고추는 놀랍게도 외국에서 건너온 식물입니다.
한국인의 입맛을 정의하는 ‘매운맛’, 그 중심에 있는 고추는 어떻게 우리 식문화의 중심으로 자리 잡았을까요? 그리고 이 과정에는 어떤 역사적 사건이 얽혀 있었을까요?

이번 글에서는 고추가 어떻게 한국에 들어오게 되었고, 왜 그렇게 빠르게 퍼져나가 한국의 대표 식재료가 되었는지, 그 무역사와 문화적 전환을 흥미롭게 풀어보겠습니다.

“고추는 한국 토종이 아니다”:고추가 한국에 오기까지의 매운맛의 식민·무역사

고추의 원산지는 어디일까?

고추의 원산지는 중남미 지역, 특히 오늘날의 멕시코, 볼리비아, 페루 등지입니다. 고추는 약 6,000년 전부터 이 지역에서 재배되었으며, 아즈텍과 마야 문명에서 중요한 향신료로 사용되었습니다. 이들에게 고추는 단순한 식재료가 아니라 약재, 제사 도구, 무역 상품이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멕시코 요리에는 다양한 종류의 칠리(chili)가 사용되고, 각기 다른 향과 매운맛을 자랑하죠. 이처럼 고추는 라틴아메리카의 뿌리 깊은 농산물이었습니다.

 

‘콜럼버스의 교환(Columbian Exchange)’: 고추가 세계로 퍼지다

1492년,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면서 시작된 콜럼버스 교환(Columbian Exchange)은 단순한 땅의 교류가 아니라 생물과 문명의 대규모 교환이었습니다. 감자, 옥수수, 토마토, 코코아, 담배, 그리고 바로 고추가 유럽으로 건너간 대표적인 작물이죠.

스페인과 포르투갈 탐험가들은 고추의 매운맛에 빠졌고, 이를 유럽, 아프리카, 아시아로 퍼뜨렸습니다. 특히 고추는 열대 기후에서 잘 자랐기 때문에 동남아시아와 인도, 중국을 거쳐 16세기 후반경 동아시아 전역으로 확산됩니다.

 

한국에 고추가 들어온 시기와 경로는?

고추가 한국에 언제, 어떻게 들어왔는지를 정확히 짚는 것은 아직 논란의 여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임진왜란(1592~1598년) 전후로 고추가 일본을 통해 한국에 유입되었을 가능성을 가장 높게 보고 있습니다.

주된 유입 경로 두 가지 설

  1. 일본 경유설: 포르투갈 상인이 일본에 고추를 전파했고, 이후 임진왜란 중에 고추가 조선에 전해졌다는 주장입니다. 왜군이나 조선인 포로를 통해 전달되었을 가능성도 제기됩니다.
  2. 중국 경유설: 명나라 또는 청나라와의 교류를 통해 고추가 들어왔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1590년대 이전의 조선 문헌에서는 고추에 대한 언급이 없었지만, 1614년 『지봉유설』에는 고추(椒)와 비슷한 식물에 대한 기록이 나타납니다. 이후 조선 후기 농서(농업 서적)에 고추 재배법이 등장하면서 빠르게 일반 농가에 확산된 것으로 보입니다.

 

고추, 한국인의 입맛을 사로잡다: 빠른 보급과 식문화 변화

고추가 도입된 이후, 한국은 놀라운 속도로 고추를 재배하고, 이를 중심으로 새로운 조리법과 발효문화를 발전시켰습니다.
특히 고추는 매운맛뿐 아니라 방부 효과가 뛰어나 김치, 젓갈, 장류의 보존 기간을 늘리는 데도 탁월했습니다. 이로 인해 고추는 단순한 향신료가 아니라 저장식품의 핵심 요소로 자리 잡게 됩니다.

대표적인 고추 기반 식문화 변화:

  • 김치: 원래는 매운 김치가 아닌 백김치류가 주류였지만, 고추가 보급되며 붉은 고춧가루 김치가 일반화됨.
  • 고추장: 고추, 메줏가루, 찹쌀, 엿기름 등을 혼합한 발효 양념장. 18세기 이후로 대중화.
  • 매운 찌개・볶음류: 조선 후기 이후 고추장・고춧가루가 들어간 매운 국물 요리가 발달.

이처럼 고추는 한국인의 입맛과 조리 관습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야말로 ‘입맛의 혁명’이라 할 수 있죠.

 

“고추는 한국 토종이 아니다”라는 사실이 주는 의미

고추가 외래종이라는 사실은 많은 이들에게 놀라움을 줍니다. 우리가 가장 한국적이라고 믿는 양념조차도 사실은 ‘세계사적 교류의 산물’이라는 점, 이는 한국 식문화가 결코 고립된 것이 아니라 세계적 흐름 속에서 형성된 결과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이는 또한 ‘토종’이란 개념이 언제나 고정된 것이 아니라 시간과 문화에 따라 변화한다는 사실을 일깨워 줍니다.
고추는 외래종이지만, 400년이 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한국인의 생활 속에 완전히 뿌리내렸고, 결국 ‘한국의 것’이 되었습니다.

 

매운맛 속에 담긴 세계사

고추는 단순한 식재료가 아닙니다. 대항해 시대의 무역사, 제국주의와 식민지 확산, 농업기술의 발전, 그리고 한국인의 독특한 발효문화가 뒤얽힌 복합적 상징입니다.

고추의 이동 경로를 따라가다 보면, 그것은 단순히 매운맛을 추구한 여정이 아니라 사람과 문명, 정치와 경제, 환경과 문화가 만나는 하나의 역사입니다.

 

마무리하며

다음번에 김치를 한 입 베어 물 때, 혹은 고추장으로 비빈 비빔밥을 먹을 때, 문득 이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이 매운맛, 대서양을 건너왔구나.”

입에서 퍼지는 그 강렬한 자극 뒤에는 고추가 건너온 바다와 대륙의 이야기가 담겨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