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전자의 장난일까, 아니면 문화의 차이일까?
쌀국수 한 그릇 앞에서 벌어지는 극적인 반응. “와, 고수 향 너무 좋아!” 하고 기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거 왜 비누맛 나? 못 먹겠어…” 하며 얼굴을 찡그리는 사람도 있죠.
이처럼 ‘고수(cilantro)’는 한 끼 식사 앞에서 인간을 극단적으로 갈라놓는 식물입니다.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향긋한 허브지만, 싫어하는 사람에게는 화장실 세제, 빨래 비누, 심지어 썩은 맛처럼 느껴지기까지 하죠. 이 모든 반응, 사실 단순한 ‘편식’이 아니라 후각 유전자와 뇌의 인식 차이 때문이라는 걸 아셨나요?
오늘은 고수가 왜 어떤 사람에게는 천국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고통인지, 유전적・문화적・감각적 이유를 하나씩 파헤쳐봅니다.
1. ‘비누맛’의 정체는 무엇인가?
고수의 ‘비누맛’이라고 흔히 표현되는 향은, 과학적으로는 알데하이드(Aldehyde) 계열의 화합물 때문입니다. 고수의 잎에는 여러 휘발성 향기 성분이 있는데, 이 중 특히 다음과 같은 화합물이 문제가 됩니다:
- 데세날(dodecanal)
- E-2-알케날 계열 화합물
- 리날로올(linalool) 등
이들은 향수나 세정제, 비누에서 나는 ‘상쾌한 풀내음’의 주요 성분이기도 하며, 어떤 사람에겐 굉장히 익숙하고 기분 좋은 향이죠.
하지만 문제는 이 향기를 뇌가 어떻게 인식하느냐입니다. 똑같은 향이라도 후각 유전자의 차이로 인식 결과가 완전히 달라질 수 있어요.
2. 범인은 OR6A2 유전자?
고수를 싫어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주목되는 유전자는 OR6A2라는 이름의 후각 수용체 유전자입니다.
이 유전자는 특히 알데하이드 계열 향기 분자에 예민하게 반응하는데요:
- OR6A2 유전자를 가진 사람은 고수 잎의 향 성분을 매우 강하고 불쾌하게 인식합니다.
- 뇌에서는 이 향을 ‘먹는 향기’가 아닌, ‘비위생적 혹은 화학물’로 분류하게 되죠.
- 그 결과, 고수를 먹으면 마치 세제를 입에 넣은 것 같은 강한 거부감을 느끼게 됩니다.
실제로 미국 국립생명공학정보센터(NCBI)의 연구에 따르면, 이 유전자는 동아시아인과 유럽계 백인에게서 약 10~20% 빈도로 나타나며, 일부 지역에서는 무려 30% 이상의 사람들이 이 유전자로 인해 고수를 싫어한다고 합니다.
3. 문화 차이도 큰 역할을 한다
고수에 대한 반응은 단지 유전자의 문제가 아니라 문화적 노출과 익숙함의 문제이기도 해요.
- 동남아시아, 남미, 중동 지역에서는 고수가 다양한 음식에 흔하게 들어가며, 어릴 때부터 향에 익숙해지기 쉽습니다.
- 반면, 한국・일본・북미권 일부 지역에서는 고수가 생소한 향기이기 때문에, 첫 경험에서 낯선 향에 대한 거부 반응이 더 강하게 나타나죠.
- 즉, 처음부터 긍정적인 경험으로 고수를 접하면 호불호가 덜 생기며, 유전자와 무관하게 친숙해지는 경우도 있어요.
또한 같은 민족, 같은 가족 안에서도 고수를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사람이 나뉘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것은 유전자뿐 아니라, 향에 대한 개인적 기억이나 음식 경험의 차이 때문이기도 하죠.
4. 고수 싫어하는 사람도 먹을 수 있을까?
정답은 ‘조금은 가능하다’입니다. 유전자가 영향을 주긴 하지만, 향에 대한 민감도는 훈련에 따라 다소 완화될 수 있기 때문이에요.
- 고수를 다진 후 음식에 조금씩 넣거나, 레몬・라임즙과 섞어 향을 중화하면 불쾌감을 줄일 수 있어요.
- 잎보다는 줄기나 씨앗(코리앤더)은 향이 약하거나 다르게 느껴지므로, 이 부분부터 도전해볼 수도 있습니다.
- 꾸준히 소량씩 경험하면서 후각이 익숙해지면, 완전히 좋아하지는 않아도 비누맛처럼 느껴지는 극단적 반응은 줄어들 수 있어요.
하지만 유전적인 반응이 강한 경우에는, 굳이 억지로 먹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고수는 필수 영양소는 아니며, 선택의 문제니까요.
✔️ 마무리하며: 고수는 ‘비누맛’이 아니라, 후각의 문화
결국 고수는 하나의 식재료일 뿐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향긋하고 매혹적인 허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불쾌하고 이상한 비누향. 그 차이는 우리의 유전자, 후각 수용체, 문화적 경험이 만든 결과입니다. 혹시 주변에 고수를 못 먹는 사람이 있다면, "편식하지 마!"라고 말하기보다 "아, 후각 유전자가 다를 수도 있겠구나!" 하고 이해해주는 건 어떨까요?
그리고 고수를 좋아하는 당신은, 그 유전자의 축복을 마음껏 즐기셔도 좋습니다. 오늘은 당신의 혀가 조금 더 특별해진 날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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